대한민국과 감리교회의 씽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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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 여는 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데모가 일상이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필자를 모교 대학원 건물 상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으로 인도하셨다. 1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주경야독하며 학교에 가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에서 기도하게 하셨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기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기 전까지 기도하곤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교한 뒤 텅 빈 건물에 홀로 남겨진 채 드리는 기도는 무엇을 구하기보다 두려움과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그 시간은 인간적인 외로움과 영적인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때 드리던 기도의 제목은 두 가지였다.

 

주님, 홀로 기도하는 것이 너무 무섭습니다. 기도의 동역자 한 사람만 붙여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졸업할 때까지 그 기도에 아니라는 응답으로 일관하셨다.

 

또 하나의 기도 제목은 사은회 때 드릴 기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리되었다. 36개월 동안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영적인 외로움 가운데 드렸던 기도의 의미가 그때 비로소 하나로 모아졌다. 기도를 준비하던 중 거대한 댐에 균열이 생긴 모습이 보였다. 그 균열을 막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침몰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저를 저 댐의 균열을 메우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날 드렸던 기도는 졸업 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필자는 그 기도대로 살고자 지금까지 달려왔다.

 

사랑과 공의 뉴스를 창간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기도의 연장선 위에 있다. 어느 시점까지는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해 왔다면 이제는 글을 통해서도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창간하였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단순한 균열의 수준이 아니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기 직전의 모습과도 같다. 이제는 인간의 힘과 지혜만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회개다.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회개하는 민족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본 기획은 단순한 비판을 위한 글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서야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다음 세대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함께 살자는 절박한 호소다.

 

이번 호는 그 첫 번째 순서인 여는 글로서, 앞으로 이어질 심층취재의 문제의식과 방향을 독자 여러분께 밝히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신학교와 감리교회의 현실을 다루고자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호남연회와 관련하여 제보된 내용들과 인터뷰를 종합하여, 오늘의 교회와 교단이 얼마나 깊이 대한민국의 병폐를 닮아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특정 연회만의 문제이겠는가. 교회는 어떠한가. 목회자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필자는 다만 주님의 긍휼을 구할 뿐이다.

 

구원은 결국 각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은 자로 서기 위하여,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과 감리교회의 씽크홀!

 

필자가 섬기는 원천교회는 동두천에 거주하면서 이곳 상계동까지 예배에 출석하는 윤권사님이 계시다. 지난 주일 예배 후 한 주간에 일어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부엌에 씽크홀이 생겨 어려움을 겪었노라 말씀하셨다. 한 달 전 춘계 심방을 갔을 때도 멀쩡했던 부엌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갈라지더니 물이 솟고 패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인은 노후된 하수관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밤에 잠을 자는 중에 안방의 위치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었기에 그 정도였던 것에 대해,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보수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성도님들과 함께 감사하였다.

 

집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장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존재하는 부엌은 매우 중요하다.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하는 부엌은 취침을 하는 안방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불과 몇 발자국 밖에 안되는 부엌에 씽크홀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그 상황에 관한 소식을 접하며, 공동(空洞)이 확장되어가는 대한민국과 이 땅의 교회들에 경고하시는 듯한 모습으로 오버랩이 되었다.

 

 

1. 대한민국의 씽크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도로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땅이 꺼질 때 사람들은 놀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말한다. 씽크홀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오랜 시간 토사가 유실되고, 지반이 약해지고, 빈 공간이 커진 끝에 마침내 붕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씽크홀의 가장 무서운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겉은 멀쩡하기에 차량도 지나가고 사람도 걷는다. 그러나 그 아래는 이미 비어 있다. 토사가 유실되었거나 지반이 약해졌거나 또는 노후된 하수관이 터졌거나 씽크홀은 인정사정 없다. 그 위에 누가 살고 있든지, 주방이든지 침상이든지 개의치 않는다. 그 무정함과 잔인함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고 집안 전체를 무너트리기도 한다.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대한민국의 지반은 안전한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법치가 무너지고 정의는 찾아 볼 수 없으며 국회는 사람의 인권을 탄압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악법제조 공장과 같은 곳이 되었는가? 행정부는 존재하지만 권력의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지 칼을 휘둘러 겁박은 물론 세계가 보는 앞에서 매장을 시키거나 죽일 기세다. 한 국가의 기둥이 되어야 할 사법·입법·행정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지를 여실히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와 같은 상황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던 사사시대와 같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21:25)

 

대한민국에 살면서 세상 만물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세대가 겪는 고통을 아직은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목도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점점 확장되어 가는 공동(空洞)에 스스로를 매몰시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창조 이전의 세상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곳을 덮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빛이 있으라”(1:3)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이 땅은 어디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죄를 짓고도 버티면 되고, 거짓말을 하고도 우기면 되며, 약속을 깨고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염치를 버릴수록 출세하고, 기만에 능할수록 권력을 잡으며, 억지를 부릴수록 원하는 것을 얻는 세상이 되었다. 상식은 조롱거리가 되고, 진실은 침묵을 강요당하며, 정의는 힘 있는 자의 손에서 뒤틀리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어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 못자리판과 같은 신학교의 씽크홀

 

그러나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의 씽크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성경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영적 지도자들을 찾으셨고, 지도자들의 타락과 거짓을 나라의 위기와 연결하셨다. 나라가 병들기 전에 제사장이 병들었고, 백성이 타락하기 전에 지도자가 타락하였다.

 

오늘 대한민국의 위기는 생명의 산실이 되어야 할 못자리판과 같은 신학교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는 과연 이스라엘만을 향한 말씀일까?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2:13)

 

신학교는 단순히 목회 기술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설교를 잘하거나 행정을 잘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을 만드는 곳도 아니다. 신학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세우는 데 있다. 가르치는 자들이 먼저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 진리로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성자 예수님이 친히 보여 주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 이땅의 신학교는 과연 그러한가?

 

1) 정치판이 된 신학교

 

십여 년 전 K신학교(학교 이름을 칭하는 것도 이제는 너무도 부끄러워 이렇게 칭함)는 매우 시끄러웠다. 00 목사가 유00 교수의 표절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교 안팎에 큰 논란이 있었다. 결국 법원의 판단까지 이어졌고, 표절 사실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사회는 어떠한 판단을 내렸는가. 총장 자격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에도 결국 총장 선거는 진행되었고, 당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표절 문제를 제기하며 개혁을 외쳤던 사람과 그로 인해 비판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 훗날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혼자 의인인냥 떠들며 표절을 문제삼았던 목회자의 아들은 총장의 추천을 받고 전액 장학금으로 해외 유학중이며 그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12)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원칙보다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현실은 비단 정치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본성 또한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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