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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테르를 트러블러로 취급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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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광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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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여러 약점이 있는데 그중에 최악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 할 것이다. 좋을 때는 온갖 칭찬과 아부를 늘어놓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그런 씁쓸한 사건 중 하나가 주전 304, 에게해의 진주(珍珠) 로도스(Ρόδος)에서 발생했다. 로도스는 터키의 남서쪽에서 가깝지만, 에게해의 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리스에 속해있다. 사도 바울도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로도스에 들른 적이 있듯이(사도행전 21:1) 이 섬은 지중해 항해에 빠질 수 없이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로도스는 누구나 탐내는 것이다.

주전 323, 단기간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제가 갑자기 죽자, 부하들을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그중 시리아와 터키 쪽은 안티고노스가 차지했는데 그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로도스를 정복하려고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보냈다. 독립국으로 지내면서 상업적 이익을 누리던 로도스 인들에게 이 침공은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를 막아낼 힘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로도스 사람들 외에도 데메트리오스의 로도스 침공에 짜증 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집트를 차지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였다. 왜냐하면 안티고노스 측이 로도스를 장악하면 지중해 패권의 절반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막대한 해군력과 군수 물자를 보냈고, 덕분에 데메트리오스가 퇴각했다.

덕분에 자유를 되찾은 로도스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들을 살린 소테르(Σωτήρ 구원자)라 칭송하며 신전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그 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에는 소테르가 추가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하고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법, 시간이 흘러 로도스가 안정을 되찾고 번영을 누리게 되자, 구원자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보며 로도스 인들은 감사 대신 간섭을 떠올렸다. 위기의 순간에 내밀어 준 손은 한없이 고마웠겠지만, 배부를 때 찾아오는 손은 족쇄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전에 자신들을 살려준 소테르가 이제는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트러블러(Troubler)라고 생각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감사는 유통기한이 짧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구원의 기억은 옅어지고 현재의 불편함은 증폭된다.

 

이러한 배은망덕 현상은 2,300년 후 대한민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1950, 신생국 대한민국은 김일성의 소련제 탱크에 밀려 낙동강 전선에서 생명이 꺼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기적적으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았는데 말이 유엔군이지 그중 90%는 미군이었다. 36,940명의 미군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 10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고 천문학적인 물자가 쏟아졌다. 생소한 나라를 구하려고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 청년들은 현대판 소테르였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국제 정치에서 순수한 도움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로도스를 도운 이면에 지중해의 패권을 안티고노스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처럼 미국 역시 대한민국을 도울 때 태평양의 패권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이며 우리가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수만 명의 생명이 스러진 자리에서 지금 우리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게 다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였다라며 그들의 희생을 폄훼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구원자를 점령군이라 부르고 양키 고홈을 외치는 행태는 로도스 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를 미워한 그 변심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는 마치 목숨 걸고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누가 낳아달라고 했느냐며 대드는 패륜아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이처럼 사람이 베푸는 은혜는 순수하지도 않고, 사람을 향한 감사는 유효기간이 있다. 하지만 이런 변심이 인간 소테르가 아닌 예수님 소테르에게도 나타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은 수없이 언약을 어겼으나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셨고, 예수님은 인간들이 배신할 줄 알면서도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주셨다.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특히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옛날에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인간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소테르(구원자)를 인생의 트러블러로 취급해서야 되겠는가?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우리가 누리는 구원과 자유와 풍요로움이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할 때 소테르를 향한 감사의 유효기간은 한없이 갱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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