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죽음과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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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인간의 죽음과 목회
죽음학의 등장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급적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현대 과학문명과 의학 기술의 발전은 평균 수명을 크게 연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비례하여 죽음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려는 현상들이 여러 양상을 띠고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금기시 되어왔던 죽음의 터부를 깨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 이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벳 퀴블러 로스다. 그녀는 세계제2차대전의 참혹한 죽음의 현실을 체험하고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임상적인 경험을 지금은 죽음학의 고전이 된 『인간의 죽음』을 저술하였다. 또한 지난 50년대 이후 교회 안팎에서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 죽음학을 대학의 교양필수 혹은 선택과목으로 개설되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경우 동경대학은 1980년대부터 죽음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죽음학에 대한 연구 및 관심과 나란히 하여 사후의 삶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발전하여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는 실천신학의 관점을 가지고 한 개인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사후의 삶,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목회적 프락시스를 다루려 한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정리해본 뒤, 죽음의 용어 및 죽음의 방식과 관련된 목회적 언설의 문제, 임종자와의 관계에서 최소한 알아야 할 죽음의 의학적, 생물학적 이해이다. 두 번째는 사후의 삶에 대한 것으로서 1970년대에 등장한 임사체험 보고들과 이에 대한 신학적 반응, 그리고 죽음과 사후의 삶에 관한 목회 담론의 형성 및 프락시스를 다루려 한다.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실천신학이란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활동의 프락시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성찰이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실천신학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삼각 변증법적 관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먼저 (1)성서주석, 역사신학, 조직(윤리)신학, 기초신학 (2)성서와 전통 (3)실천신학의 삼각 변증법적 관계이다. 특히 후자의 삼각 변증법적 관계는 학제적 연구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데, 죽음에 관한 한 실천신학은 종교학, 철학, 의학, 간호학, 인류학 등과 같은 분야와 대화가 절신하고, 교회 현장의 상황과 경험도 역시 충분히 성찰되어야 한다. 본 연구는 전자의 삼각 변증법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후자의 삼각 변증법적 관계에서 준비된 것이다.
2.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한 견해들
지금까지 인간이 죽음과 사후의 삶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 무신론적, 유물론적 견해 - ‘멸절’로서의 죽음
첫째는 죽음을 인간의 멸절로 보는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며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시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육체적 기관이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변하여 남는 것은 있다고 할지라도 개체 인격으로서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나아가서 이 견해는 영혼, 천국, 열반, 내세의 심판 등과 같은 온갖 종교적 표상들을 거부한다. 이 견해의 주창자는 영생에 초점을 둔 구원 이기주의적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한 포이에르바흐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지성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죽음에 대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2) 철학적인 견해
우리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본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죽음이 중요한 주제로 취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 너머 세계의 실재를 인정하고, 이와 관련시켜 죽음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철학자들은 죽음을 현존재의 종말임을 인정하고 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진정한 삶”과 “거짓된 삶”을 구분하려고 한다. 철학이 사후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통적으로 철학의 분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형이상학은 죽음 이후의 인간의 운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나아가 철학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문제도 취급한다. 여기에는 크게 5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에피쿠로스적인 주장으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이 매우 괴로울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해있으나 막상 죽음 그 자체는 절대 괴로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스토아 철학의 주장으로서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의 견해가 있는데, 인간은 절대로 죽음을 정확히 알거나 직시할 수 없기에 그날 그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에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낙관론적 견해가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염세주의적 견해로서 죽음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이 있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주제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매우 흥미 있는 것들이며 한 번 논의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3) 종교적인 견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는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앙과 사상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주요 종교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 사상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타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운명론적인 죽음관, 장례 예식을 통하여 나일강의 신 오리시스처럼 죽음의 왕국에 새로 태어난다고 믿음 고대 이집트인들의 영생관, 도덕적 이원론에 기초를 두고 각 사람의 삶의 질에 따라 사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심파 사상을 제시한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죽음 사상, 스올 개념과 함께 희미한 부활의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유대교적 사상, 그리고 희랍과 로마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죽음관이 있다.
기독교의 죽음 및 사후의 세계관은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로 나누어지는데, 가톨릭은 교리적으로도 다소 통일되어 있는 데 비하여, 개신교회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등의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기독교의 죽음관은 인간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신학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의 죽음을 말하는 초기 기독교 사상과 이러한 영혼불멸적인 희랍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히브리적인 전일적 인간이해와 함께 몸의 부활과 영생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칼 라너는 그의 『죽음의 신학』에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의 죽음을 말하는 가톨릭 교리가 내재하고 있는 영혼불멸적인 함축성 즉, 하나님 없이도 자존할 수 있고 스스로 불멸성을 지니는 영혼의 불사불멸성 문제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라너는 “위격적 정신적 영혼이 육체 조직이 해체되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 고유한 생명을, 물론 이전과 도대체 다른 양식으로 유지한다”고 봄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였으나, 이 불사불멸성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불사불멸성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전통적 교리를 보완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후 세계관에 대하여 머튼 켈시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는데, 이 입장들은 나름대로 성서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먼저, 오래 동안 서방 기독교회의 공식적 견해가 되어온 주장으로서 일종의 문자적이요 근본주의적인 입장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죽은 자는 세계의 종말의 날 모든 사람이 부활 때까지 무덤 속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한편, 13세기 서방 기독교회가 그 세력을 크게 떨칠 무렵, 단테의 <신곡>에서 자세히 묘사된 것과 같은 공식적인 사후 세계관이 등장하였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는 단테가 그린 이러한 지도는 이 우주와 지구라고 하는 물리적인 시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책으로 간주되었다. 개신교회는 이 견해 따르지 않고, 오늘날의 과학도 이 견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면서 도래할 천국의 구체적 청사진을 원하는 이들에게나 이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이 견해가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사후 세계관은 나사렛 예수가 전해준 영생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에서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하여 하늘나라를 설명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견해들이 나타나게 된다. 또 그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훈은 문자적인 해석과 동시에 상징적인 해석이 가능하며, 이러한 해석에 의하여 모호한 영생관에서 시작하여 보다 더 구체적인 영생관의 깊이와 폭이 결정되는 것이다.
3. 죽음의 목회적 용어 - ‘하나님의 부르심’의 문제
우리말에는 죽음을 뜻하는 다양한 언어들이 있다. 이를 일컬어 생명종식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고이 잠들다, 밥 숟가락 놓다, 숨지다, 눈감다, 목숨이 다하다, 목숨이 끊어지다, 뒈지다, 운명하다 등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용하는 죽음 표현의 언어군들은 ‘하늘나라 가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 주의 나라로 부름을 받다, 세상을 떠나가다, 영생하다, 주께서 데려가다, 주님 품에 안기다, 주안에 잠드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다’ 등이 있다. 교회의 죽음 표현에는 ‘하나님 혹은 주님께서 부르셨다’라는 언어군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다’라든지 ‘하나님 나라로 가다’라는 신앙적 표현이 골고루 나타나있다. 이 용어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나타나 있으며, 죽음조차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에 의한 것이라는 소박한 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경우, 많은 경우 확신보다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예를 테면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여름 괌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대참사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욥기적 질문 못지 않게 신학적이며 실존적인 것이다. 랍비 해롤드 쿠슈너는 그의 저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에서 이러한 질문을 체험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조로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요절한 자신의 아드ᅟᅡᆯ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세상사는 물론,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까지 하나님의 뜻에 돌리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하나님 신앙 안에서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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