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23): 이적 체험이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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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23):
이적 체험이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
권혁정 교수
이전 2-4장이 유대교의 정결 의식(2장 전반부), 성전(2장 후반부), 랍비(3장), 야곱의 우물, 즉 시내 산 언약 체계(4장)를 언급함으로써 요한은 예수님을 유대교의 여러 제도들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묘사했다면, 이제부터 살펴볼 5장부터 10장에서는 안식일(5:10), 유월절(6:4), 초막절(7:2), 수전절(10:22) 등 유대교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절기들을 배경으로 제시함으로써 예수님을 유대 절기의 의미를 실현하는 참 메시아로 그리고 있습니다.
5장의 표적 사건인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 또한 절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치유 사건을 시작하는 1절에 보면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었습니다. 이 명절이 어떤 절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평소 관습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방문하셨습니다(2절). 이 못은 주전 2세기에 만들어진 길이 100~110미터, 너비 62~80미터, 그리고 깊이 7~8미터의 쌍둥이 연못으로 행각이 5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행각 안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등 많은 병자가 누워있었습니다(3절). 이들은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동(動)하게 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어떤 병도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물이 움직이면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 치유를 받으려고 연못가에 죽치고 있었습니다(4절).
이렇게 각색 질병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곳은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유대인 상류층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에 가셨던 것처럼, 이 터부시되는 베데스다에 가셨습니다.
‘베데스다’란 ‘집’을 뜻하는 히브리어 ‘벧’과 ‘자비 또는 은혜’를 뜻하는 ‘헤세드’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자비 혹은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비와 은혜로 가득해야 할 집에서 전혀 자비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 병자들의 모습은 당시 유대교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림 언어였습니다. 예루살렘 한 귀퉁이에 방치된 이 병인들을 통해 유대교가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은 명절을, 축제를, 은혜를 맘껏 누리면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긍휼히 여기는 사랑은 없고 메마른 의식만 남은 죽은 종교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은 이 병인들 가운데 38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5절). 잦은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급속한 유아 사망률로 인해 1세기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년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감안해 볼 때 38년 동안 병상에 있던 이 병자는 거의 한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 가운데 살아온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이 사람은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절대 절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름도 없는 이 사람, 소망이라곤 1도 없는 이 가련한 인생을 사람들은 ‘부정하다, 비참하다’ 이렇게 바라볼 때 우리 주님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6절).
예수님의 이 물음에 병자는 그냥 “아멘, 낫고 싶습니다” 이렇게 한마디만 했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줄줄이 댔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 딴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7절).
만일 주님이 이 사람의 요구대로 해줘서 물이 동할 때 연못 속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게 했다면 병 고침은커녕 옷만 젖고 망신만 당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이 만성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8절).
이 38년 된 병인의 치유에는 2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믿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 치유는 그를 메고 온 친구들도 믿음이 있었고 그 병자 자신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이 병자는 믿음의 고백이 전혀 없었습니다. 둘째로, 이런 사람을 치유할 때 주님은 그 어떤 매개체도 쓰지 않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말씀만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절대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피조된 세계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의 절대 권위를 보여줍니다. 아울러 이 38년 병자를 통해서 우리의 절대 무능을 보여줍니다. 병 치유에서 이 병자의 공헌도는 ‘0’ 퍼센트였습니다. 이에 반해 주님의 공헌도는 ‘100’ 퍼센트였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그 자리를 뜨셨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나서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14절). 하지만 이 사람은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을 고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15절).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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