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26): 사탄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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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 요한복음 연재(26):
사탄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권혁정 교수
오병이어 표적 사건 바로 다음에 바다 위를 걷는 표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이 5,000명이라는 다수의 군중들에게 신적 능력을 나타낸 사건이라면, 바다 위를 걷는 이적은 12명의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민족주의적이고 정치·군사적인 메시아로 주님을 오인하여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메시아 관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먼저 하산해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 14:22). 제자들은 지시한 대로 내려갔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요한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니”(16∼17절).
여기 시간을 지칭하는 유사한 두 용어 ‘저물매’와 ‘어두웠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의 ‘저물매’는 헬라어로 ‘옵시아’인데, 이는 물리적으로 해가 져서 어두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17절의 ‘어두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코티아’로 물리적으로 해가 없음이라기보다는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를 나타낼 때 주로 쓰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에는 어두움이 있을 뿐입니다.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흑암 상태에 있었던 제자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들은 이중적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시킨 것은 바람과 파도였습니다(18절). 남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북쪽 레바논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해수면 200m 아래에 있는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면 자주 풍랑이 일곤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는 통상 경험하는 일이었지만 이날의 바람과 풍랑은 이 바다 전문가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해 질 녘에 출발해서 오전 3시까지 전력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6km 정도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가장 넓은 곳의 폭이 12km 정도이기에 정상적인 일기였다면 벌써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을 시간이었지만 이 심상치 않은 풍랑으로 인해 이들은 밤새 노를 저어 수심이 가장 깊은 갈릴리 바다 정중앙에 도달했습니다(19절 상).
이때 그들의 공포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이는 그 바다 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표류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뚜벅뚜벅 걸어오시고 있었습니다(19절 하). 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미라클 메이커시다, 슈퍼맨 같은 분이시다. 이런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걷는 이 이적 사건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영어로 사인(sign)입니다. 그래서 이 이적을 통해 사도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바다의 물결을 밟고 오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9:8을 보면 “여호와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바다’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대적으로 종종 이해되었습니다. 홍해는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나안 땅 진입을 막는 장애물 구실을 했습니다. ‘바다’는 또한 뱀 혹은 용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본부 역할을 합니다. 사탄은 물속에 있습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그러므로 바다를 밟고 오는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미라클 메이커가 아니라 원수인 마귀를 지근지근 밟고, 정복하고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물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한 마귀가 제아무리 날뛰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고 제자들을 두렵게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그것을 짓밟고 그 위에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절). 이 말 속에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여기 “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고 에이미’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말이기 때문입니다(출 3:14).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을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상태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지만, 주님이 함께하시자, 샬롬이 찾아왔고 기쁨이 넘쳤습니다(21절 상).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이 반복해서 하셨던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음성이 예수님의 입술에서 발설되자 제자들에게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을 때는 두려워했지만 음성을 듣고는 기뻐했습니다. 신자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귀로 ‘듣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낸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것입니다.
같은 이적 기사를 기록한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자 즉시 풍랑이 잠잠해졌다고 기록합니다(마 14:32; 막 6:51). 하지만 요한은 그런 언급은 없고 즉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21절 하). 이는 또 하나의 표적입니다. 주님이 배에 당도하기 전에 배는 갈릴리 바다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육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배에 올라타시자,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을 때, 즉 부재하셨을 때 그들은 속된 말로 개고생하고 제자리만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자, 즉 임재하시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배는 쾌속정이 되어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직행했습니다.
시편 107편을 기록한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광풍이 몰아치고 큰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온함을 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시며 그들을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합니다(시 107:25-31). 따라서 시편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의 제자들을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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