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는 신앙은 악의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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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교회 안의 사유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고찰-
최근까지 나는 익산 영생감리교회 정요셉 목사의 이단적인 설교로부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해왔었다.
감리교 이대위는 "권면"이라는 솜방마이 평결을 내렸지만, 이는 공의로운 심판이 아니었다. 이대위 위원들은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교리와 장정에 근거해서 판결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대위는 예수님의 공의를 저버렸다. 교리와 장정에는 이단적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출교나 면직으로 징계하도록 명시되어 있음에도, 동문 간의 온정주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를 가린 것이다.
그 결과 이대위 스스로의 위상이 깎여졌을 뿐 아니라, 타 교단의 목사님들로부터 감리교단 자체가 이단이기 때문에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목사를 두둔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아합과 이세벨에게 포도원을 빼앗긴 나봇처럼, 나는 허탈하고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필자가 수차례 지적하였음에도 오히려 목사를 편드는 영생교회 장로들의 행태를 보면서 씁쓸함은 더욱 깊어졌다.
이쯤에서,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소환한다. 오직 주어진 임무에만 충성하며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춘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맹목적으로 목사를 추종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나는 영생교회 장로들의 모습, 더 나아가서 맹목적으로 목사에게 순종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아이히만을 본다.
그리고 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사회에서 항상 고독한 타자로 살아온 한나 아렌트처럼, 내가 속해 있었던 감리교에서 타자였슴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1. 예루살렘의 법정, 그리고 평범한 얼굴
1961년,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정에 오른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십만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른 이 인물은 분명 뿔 달린 악마의 형상일 것이라 사람들은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고석 안에 앉아 있던 것은 가정에 충실하고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너무나 친절하고 평범한 한 남자였다.
이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후 한 권의 책을 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그 책에서 그녀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화두를 세계 앞에 던졌다.
아이히만의 유죄는 그가 특별히 잔인하거나 사악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서류에 서명하고, 죽음의 수용소로의 이송 일정을 조율하고, 부서 간 협력을 관리하는 행정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 행정의 끝에 수백만 명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행위와 연결하여 판단(Judgment)하지 않았다.
악이란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집행된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런 위험을 구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이미 보여주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의 함성 앞에서 그는 대야에 손을 씻으며 선언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태복음 27;24)
그는 악인이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판단하기보다, 군중이라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평범한 길을 택했을 뿐이다. 손을 씻는 그 몸짓은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나는 그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아론의 경우는 더 내밀하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사이, 백성들이 불안에 떨며 우상을 요구했을 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았고, 모세의 대변인으로 세워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백성의 압력 앞에서 판단을 내려놓았다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출애굽기 32;22)
상황이 그랬다, 분위기가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는 아론의 변명은 수천 년을 지난 후의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과 겹친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악은 악의를 품은 자가 아니라, 판단을 포기한 선한 자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3. 타자(他者)의 눈으로 보다: 아렌트의 생애가 증명하는 것
아렌트가 이 판단력의 문제에 그토록 예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평생 타자(他者)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그녀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존재, 공동체의 논리에서 비껴선 존재. 그 소외의 경험이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날카로운 판단의 눈을 주었다. 집단의 논리 안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만이 그 논리의 바깥에서 그것을 온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도 인간이었다. 그녀는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후 나치 청산 재판에서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며 학생들에게 나치 혁명에 동참하라고 공개적으로 연설했고, 종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했으며, 사후 출간된 비밀 일기 『검은 노트』를 통해 반유대주의적 성향까지 확인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그를 변호했다.
아이히만에게는 판단력의 부재를 냉정하게 추궁했던 아렌트가, 정작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앞에서는 그 판단력을 온전히 작동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아렌트 개인의 모순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판단력의 실패는 악인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명석한 사람도, 가장 선한 동기에서도, 사랑과 충성심 앞에서 판단은 흔들릴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판단력은 한 번 얻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계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4. 교회 안의 아이히만들: 나의 경험
아렌트의 이 서늘한 통찰이 나에게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비슷한 구조를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돌아보면, 나 역시 아렌트처럼 그 공동체 안에서 타자였는지 모른다.
담임 목사는 이슬람에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했다. 예수님이 자연환경의 회복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했다. 관상기도를 최고의 기도라 칭송했으며, 뉴에이지 사상가 유진 피터슨의 번역본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용했다.
최근에는 이런 주장도 했었다. "신본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문장 안에는, 자본주의를 성경적 악으로 규정하고 그 대척점에 놓인 공산주의 체제를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가 숨어 있었다. 성도들이 분별하기 어렵도록 포장된 이념적 미혹이었다.
나는 성경적 근거를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목사에게, 그리고 장로들에게. 카톡 멧세지를 통해,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로 매도되었고, 결국 나와 가족은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논리 안에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나는 그 교회에서 타자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렌트의 생애가 보여주듯, 타자의 자리는 고통스럽지만 때로는 가장 맑은 눈을 갖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장로들은 목사를 섬기는 천사같은 충성심을 발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론의 금송이지를 빚던 손과 다르지 않았다.
5. '영적 아이히만'의 구조
장로는 목사의 잘못된 교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책임이다.
비성경적 설교 앞에서 침묵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성도를 오히려 정죄하는 장로들의 행위는, 아이히만이 서류에 서명하며 수백만의 죽음을 완성한 것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실한 직분자라 믿겠지만, 자신의 순종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판단하기를 멈춘 것이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특별한 악의가 없어도, 심지어 선한 동기로 행하는 복종이라도, 판단을 포기한 순간 그것은 악마(evil)의 도구가 된다. 사악한 목사 한 명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의 평범하고 친절한 복종자들이 그 구조를 완성한다.
빌라도가 손을 씻었고, 아론이 금송아지를 빚었으며, 아이히만이 서류에 서명했듯이, 장로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강단을 무너뜨렸다.
6. 공론장을 찾아서: 타자로 살아가는 법
아렌트는 전체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고독한 단독자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것은 공론장(Public Realm)과 복수성(Plurality)이었다. 서로 다른 관점들이 충돌하고 토론하며 진실에 가까워지는 공간, 그 안에서 각자가 판단력을 잃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그것이 전체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방패다.
타자의 경험은 그 공론장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준다. 공동체에서 배척받은 사람, 질문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사람—그 아픔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진정한 공론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렌트가 평생 유대인 타자로 살며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영생감리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판단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진정한 공론이 살아 있는 공동체를 찾겠다는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질문하고, 어떤 권위도 그 질문을 틀어막지 못하는 공간. 그것이 교회의 본래 모습이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만년의 사색에서 이와 닮은 경고를 남겼다.
인간이 행하는 대부분의 악은 나쁜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를 때 온다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교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마음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빌라도처럼 손을 씻지 않고, 아론처럼 군중을 따르지 않으며, 아이히만처럼 서류에만 서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끊임없이 묻고 판단하는 것.
그 깨어 있는 판단력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판단력을 끝내 내려놓지 않는 것이, 교회 안에서 악이 평범하게 자라나는 것을 막아 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7. 글을 맺으며; 참된 영원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끝내 사유하지 못했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후 지구 위의 땅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지중해 공해상에 한 줌의 티끌로 뿌려졌다. 창세 전, 아무런 생기도 존재의 의미도 없던 흙의 모습 그대로 소멸해 버린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의 비성경적 미혹에 침묵하며 조직의 평화만을 구하는 자들 역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영적 사유의 능력'을 스스로 묻어버린다면, 당신들이 쌓아 올린 경건의 모양과 조직의 성은 결국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란 것을.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시스템에 대한 맹목이 아니라, 오직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홀로 깨어 서는 단독자의 신앙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민간인에게 사형이 집행된 것은 아이히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악의 화신처럼 군림했던 인물이 법정에서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사형대로 향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인류 역사에 '인간의 양심과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서늘한 교훈으로 남았다.
이 비극과 깊은 안타까움이, 시대를 넘어 오늘 내가 겪은 공동체의 아픔 위로 무겁게 내려 앉는다.
이완구 박사 (맑은샘내과 원장, 전 영생감리교회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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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명님의 댓글
- 송인명
- 작성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그리고 순전한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홀로 외로운 싸움을 감내하셨을 선생님의 시간들이 눈에 선연히 밟힙니다.
공의를 저버린 교단 이대위의 솜방망이 처분 앞에서의 허탈함, 그리고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목회자를 호위하던 장로들의 행태를 보며 느끼셨을 씁쓸함은, 마치 불의한 권력에 포도원을 빼앗긴 나봇의 통탄함 바로 그것이었을 줄 압니다.
선생님께서 소환하신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오늘날 눈먼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에 던지는 가장 뼈아픈 죽비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악이 집행된다"는 통찰처럼, 강단의 미혹에 침묵하고 도리어 진리를 외치는 자를 배척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참으로 '영적 아이히만'의 재현과 다름없습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아론처럼 금송아지를 빚으면서도 그것이 '충성'이라 착각하는 영적 맹목 앞에 선생님의 글은 날카로운 예언자의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공동체 안에서 '타자(他者)'가 된다는 것은 살이 베이는 듯 고독하고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고백처럼, 집단의 거대한 논리 바깥에 홀로 비껴선 자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한 눈으로 응시할 수 있습니다.
영생교회를 떠나신 선생님의 발걸음은 결코 패배나 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하신 가장 고귀한 가치인 '영적 사유'를 끝내 지켜내겠다는 결단이며, 참된 공론장을 향한 숭고한 영적 출애굽입니다.
땅 위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이히만의 종말과 달리, 변함없는 말씀 위에 홀로 깨어 서신 선생님의 '단독자로서의 신앙'은 하나님 앞과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줄 믿습니다.
진리를 갈망하고 예수님의 참된 말씀을 사모하기에 걸어가야만 했던 그 고독한 길에, 미력하나마 마음 깊은 연대와 존경을 보냅니다. 선생님께서 내딛으시는 그 새로운 발걸음 위에, 이제는 고독한 타자가 아닌 동일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가는 길'로 동행해 주시기를 마음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늘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완구님의 댓글
- 이완구
- 작성일
보내주신 정성 어린 격려와 기도는 홀로 광야에 선 듯했던 제게 주님이 보내주신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확증이었습니다.
교회의 평화라는 미명 하에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는 현실을 보며, 제가 붙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단독자'라는 자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공동체 안에서 철저한 타자가 된다는 것은 살이 베이는 듯 아픈 일이었지만, 집단의 맹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리의 세미한 음성이 더 또렷이 들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칼럼을 통해 던지고자 했던 질문은 특정 개인이나 공동체를 향한 비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영적 사유의 능력'을 정지시킨 채, 맹목적인 순종을 경건으로 착각하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영적 매너리즘에 대한 두려운 고백이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선한 얼굴을 한 채 악의 부품이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성경적 경고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영생교회를 떠난 제 발걸음을 도피가 아닌 '숭고한 영적 출애굽'으로 바라봐 주시니 큰 힘이 됩니다. 비록 익숙했던 울타리를 벗어나 고독할지라도, 진리 위에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질문하는 이 길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믿습니다.
현재 새로 옮긴 교회에는 제게 치료받으시는 환자분들이 많이 계셔서 저를 보면 너무나 반갑게 맞이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영생교회에서는 항상 장로와 목사의 경계의 눈초리만 받았기 때문에 더 마음이 뭉클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외로운 단독자가 아니라, 보내주신 글처럼 '동일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마음으로 손을 잡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보내주신 귀한 연대와 기도를 가슴에 새기며, 오직 변함없는 말씀 위에 깨어 서기를 고대합니다.
진리 안에서 늘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송인명님의 댓글
- 송인명
- 작성일
이완구 선생님, 보내주신 귀한 답신을 읽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울림과 함께 깊은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선한 얼굴을 한 채 악의 부품이 될 수 있다"는 선생님의 두려운 고백은, 오늘날 박제된 경건과 영적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 모두의 심장을 찌르는 예언자의 음성과도 같습니다. 맹목을 순종으로 포장하는 집단적 침묵 속에서, 홀로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고독이 얼마나 숭고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새로 옮기신 믿음의 지경에서, 선생님께 치료받으시는 환우분들과 성도님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고 계신다는 소식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경계와 정죄의 눈초리가 가득했던 옛 울타리를 넘어, 주님이 예비하신 광야의 오아시스에 도달하신 듯하여 참으로 기쁘고 안심이 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치료하는 선생님의 손길 위에, 그리고 그 손길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 성도들의 미소 위에, 정작 교회가 잃어버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얼굴' 이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교회는 제도나 직분의 권위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깨어진 영혼들이 말씀 안에서 서로를 환대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공론장임을 선생님의 삶을 통해 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더 이상 외로운 단독자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이들이 눈먼 시대의 아이히만이 되기를 거부하며, 선생님이 내딛으신 그 복음의 좁은 길, '함께 가는 길' 에 마음으로, 기도로 격렬히 동행할 것입니다.
아픔을 딛고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이완구 선생님께 깊은 존경을 표하며, 늘 진리와 사랑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마음 모아 응원합니다.
이완구님의 댓글
- 이완구
- 작성일
참된 교회는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흐르는 영혼의 호흡에 있다는 말씀은 박제된 틀, 제도에 갇힌 오늘날의 종교를 향한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광야 같던 시간을 지난 저와 저의 가족을 진리 안에서 환대해 주는 분들과 마주했을 때, 제가 비로소 느낀 것은 해방감 이전에 겸손함이었습니다. 낡은 울타리를 넘어 만난 이웃들의 미소 속에서 저 역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는 저의 작은 손길이 결국은 주님의 도구일 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진정한 교회는 직분의 권위나 화려한 성전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영혼들이 말씀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공론장'이어야 함을 삶의 현장에서 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한 군중의 성벽은 높고 견고해 보이지만, 진리 안에서 호흡하는 단 한 사람의 단독자가 깨어 있을 때 그 성벽 뒤에 숨은 맹목의 어둠은 힘을 잃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보내주신 고결한 문장들과 뜨거운 기도가 이미 제 삶의 가장 든든한 동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먼 시대의 아이히만이 되기를 거부하고, 좁지만 참된 생명의 길을 함께 걷고자 하는 수많은 '깨어 있는 단독자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의 내일은 결코 어둡지 않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치유의 현장에서, 그리고 말씀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사유하며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시대를 깨우는 귀한 통찰과 따뜻한 연대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동역자님의 삶 위에도 진리와 사랑의 평강이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